냉정하면서 현명했던 영조의 두가지의 모습냉정하면서 현명했던 영조의 두가지의 모습

Posted at 2015. 1. 2. 17:58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반응형

조선 전기에 세종대왕이나 성종이 있었다면,

후기에는 영조와 정조가 아주 뛰어난 왕이었죠.

 

여기서 영조의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그에게도 약간의 의문스러운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점이 발견이 되고,

그의 단점들이 있어보이나, 그는 그것들을 덮어줄만한

뛰어난 정치력이나 포용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일단 영조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어머니의 자손이라

왕위에 오르기 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비록 왕자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적자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어머니의 태생이 천했다는 점,

당시 중전이었던 장옥정에게서 아들이 있었다는 점 등을 살펴보면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점에서 꽤난 고생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조와 경종의 묘한 관계

 

드라마 동이에서 보면 두 사람의 관계를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형제의 관계로 나오죠.

 

경종은 장희빈의 적자로서 당시 몰락한 남인의 자식이었다는 점에서

왕위에 오르는 것 부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남인과 서인의 대립, 장희빈과 동이의 대립 등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형제의 관계와 정치적인 묘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영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

 

영조의 냉정함의 극을 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죠.

 

이 역시도 노론 대신들에 의한 정치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왕과 세자 사이의 불행한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던 이 부분에서는 영조도 평생 후회를 많이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로 그 다음의 왕위를 사도세자의 자식이었던

정조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으로 약간의 증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조 또한 결국은 할아버지였던 영조를 이해했고,

그것은 조선후기에 두 왕들이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증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영조에게서 약간의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이 있다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그를 성군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만큼 그가 다른 왕들과는 다른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겼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그 다음의 왕이었던 정조가

그토록 훌륭하고 현명했던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노론과 소론이 집권하던 시기로,

왕권보다 신하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그처럼 신하들과의 힘의 조화를 잘 이루면서

왕의 업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것은 쉽지는 않았을 일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정조도 결국은 영조만큼 신하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지는 못했고,

평생 노론의 힘에 대립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치적인 노력을 했으나

신하들을 다스리는 리드십은

영조에 비하여 조금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작권 : 이 글은 본인이 직접 비평한 글입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