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의 고구려 정벌 실패와 대운하 건설 이야기수양제의 고구려 정벌 실패와 대운하 건설 이야기

Posted at 2017. 2. 4. 21:35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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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의 고구려 정벌 실패와 대운하 건설 이야기

 

수양제(양광)는 중국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왕 중에서 한명이지만, 우리나라로서는 을지문덕을 떠올리게 하는 약간은 우스꽝스럽고 형편없는 왕 중에서 한명입니다.

 

수문제가 수나라를 통일시키고 첫째 왕자를 왕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수문제의 병이 악화되자 형을 죽이고 양광이 왕이 됩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한 군주가 되기 보다는 자신의 업적이나 명예를 더 쫓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백성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크게 개이치 않았다고 합니다.

 

 

1. 고구려 정벌시도

 

통일된 중국에서 2대 왕인 수양제는 더 이상 꺼리낄 것이 없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돌궐이나 중국 서부 지방 등의 정벌사업을 벌였는데, 그들의 군대의 일부만 침략 했을 뿐인데도 쉽게 무너졌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수나라에 바쳐야했던 조공을 거부했고, 이에 버릇을 단단히 고치고자 한 황제는 중국의 전 병력(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침략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을지문덕이라는 걸출한 장수가 있었기에 10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거의 10배 이상의 병력을 전멸시킵니다.

 

이에 화가난 수양제는 다시 복수를 결심하고 재침략을 하지만 이미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진 군인들은 모반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쯤에 이연이라는 자가 중국을 다시 재통일하고 당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2. 대운하 건설

 

우리나라에서도 몇년 전에 대운하 건설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4대강 건설로 바꾸어서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금으로부터 거의 1500년 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대운하가 건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국토도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데 그것을 백성들이 특별한 장비도 없이 손수 실행했으나 그들의 인생은 궁핍했고 황제에 대한 원망도 가득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운하가 왕성 됨에 따라서 중국의 물자의 수송은 훨씬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100만에 가까운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면서 이룬 업적이었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후세의 중국의 발전에 기여를 많이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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