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아들 고종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흥선대원군과 아들 고종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

Posted at 2016. 8. 3. 18:04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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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아들 고종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도 전례가 없는 살아있는 대원군을 모신 어린왕의 사례입니다. 대원군은 원래 경원이씨지만 전왕인 철종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그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대비와 정치적인 밀거래를 통하여 둘째 아들은 왕실과 조금 더 가까운 촌수로 접근이 가능했고, 급기야는 다음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조대비는 수렴첨정을 통하여 왕실에서의 한을 풀어가고자 했다고 합니다.

 

 

1. 대원군의 정치적 과욕

 

조선 초기에는 수렴청정을 마치면 어린 왕은 직접 통치를 시작했는데 대개 성인이 되는 20세가 기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점차 15세 이후에 수렴청정을 마치고 집접 통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고, 전례에 따르면 3년이 지나거나 최소한 늦어도 8년이 지나면 직접통치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22세가 되어도 여전히 부친인 이하응은 실세를 쥐고 있고, 정작 왕인 자신은 거의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는 신세였습니다.

 

비록 자신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부친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지존의 자리에 올랐고 성인이 된 상황에서도 자신을 도운다는 명목으로 섭정을 하는 데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신들이나 사대부들도 왕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으니 결국 이하응은 물러날 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치적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에 아들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하겠습니다.

 

 

2. 명성황후와의 단합

 

명성황후는 원래 집안 자체가 권력에 거리가 멀었던 관계로 비록 중전의 입장이었지만 힘있는 외척세력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고종이 자신의 친정이 늦어지고 있음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그를 도울 방안을 의논을 하면서 서서히 왕과 중전은 같은 세력권으로 뭉쳐집니다.

 



 

그녀는 정치적인 수완이 좋아서 최근에 정치적으로 소외된 안동김씨 세력을 포섭하고, 각종 주요 대신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때 쯤 서원정리나 양반에 대한 납세로 불만이 많아진 사대부들 중에서 한명인 최익현을 앞세워 대원군의 정치적 퇴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이하응은 왕실 세력에서 물러나고 사가에서 지내개 되지만 이후에도 왕과 중전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고, 여러번을 실패를 통하여 결국 사가에 갖히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비록 부자관계지만, 아버지와 아들조차 정치는 공존할 수 없다는 옛말은 여기에서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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