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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전쟁 2016.07.31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전쟁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전쟁

Posted at 2016. 7. 31. 18:06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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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전쟁

 

3대의 왕을 거치면서 이어지던 세도정치는 흥선대원군이 등장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왕권에 비하여 신권이 심하게 막강해진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하응은 다양한 방편으로 개혁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부터 서서히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불꽃틔는 정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 대원군의 섭정시대

 

이하응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유일한 살아있는 왕의 친부입니다. 이외에도 대원군이라는 직함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나이 어린 고종이 직접 정치를 맡기에는 역부족이므로 조대비에 의한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이하응은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역할을 그가 맡았다고 합니다.

국고를 보다 풍족하게 하기 위하여 양반에게도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전국의 서원을 대거 철폐하여 양반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문제점의 핵심을 정확하기 파악하고 개선하려고 했던 시도 임에는 틀림이 없겠습니다. 이 당시는 왕이나 민비는 그저 명목 뿐인 지위만 가지고 있었고, 실세는 모두 그가 장악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고종친정의 명분에 의하여 정계에서 물러나다.

 

고종의 나이가 22세가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아버지의 정치적 세력 하에 있음을 불만스럽게 여기면서 서서히 명성황후와의 정치적 단합을 시작하게 됩니다. 민비는 임금이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그를 비판하였고, 최익현이 상소를 올림으로서 그는 정계에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하게 됩니다.

 

뭇사람들은 그가 민비보다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밀려났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정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간을 이미 넘겼으므로 전례 상으로 더 이상 최고의 위치에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3.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쟁

 

섭정기간 동안 그의 일을 충분히 잘 맡았기 때문에 더 이상 권력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는 더욱 뛰어난 인물로 남았을 수도 있었으나 한번 맛을 본 권력은 쉽게 잊혀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신식군대가 들어오면서 구식군인들은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마저도 밀린 월급이 13개월이나 되었으니 불만이 대단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를 몰아내고 다시 흥선대원군을 복귀시키려고 했으나, 황후의 재빠른 판단으로 위험을 피한 후에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아관파천의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은 이하응이 청나라에 잡혀가는 사건입니다.)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며칠 동안 신정부를 반포하는 등으로 개혁을 이루려고 했으나 청나라의 군대가 고종에 협조하면서 3일 만에 무산되고 맙니다. 이들 세력은 이하응을 지지하고 민비의 청나라 사대외교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면서 엄청난 병력이 중앙정부로 몰려오자 왕은 일본군의 도움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일시적인 허위 약조를 하게 됩니다. 농민들이 중앙정부를 칠 수 있는 명분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이하응은 이때 자신도 그들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대대적으로 일어났으나 현대무기로 무장된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패하게 됩니다.

 

이후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마친 일본은 조선의 외교정책에 의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판단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각자 입장은 달랐으나 국가를 위한 개혁이나 애국심, 정치적 역량은 모두 뛰어난 준걸이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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