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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효종의 북벌론은 명분과의 싸움 2016.04.20

효종의 북벌론은 명분과의 싸움효종의 북벌론은 명분과의 싸움

Posted at 2016. 4. 20. 17:02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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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론은 명분과의 싸움

 

인조 다음의 왕으로는 소현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 얼마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독살설을 제기하는데 정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에서 오랜 기간 머물러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인조는 아예 그의 얼굴을 보러 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으로 독살설에 대한 의혹을 불러오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의심만 할 수는 없겠죠. 그렇게 소현세자가 봉림대군이 다음의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효종입니다.

 

 

1. 실제로 당시 병력이나 무기로는 청을 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그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효종은 북벌을 위하여 병력을 충원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당시의 경제력으로는 많은 군사를 모으기가 힘들었습니다.

 

병사들도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식량이 필요하기 때문에(실제로 일반인이 먹는 식량의 몇배의 양을 먹었다고 함.) 그것을 충당해야 할 것을 감안하면 대규모 병력을 모으는 것은

실질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뜻은 좋으나 사실은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에 불가했다는 것입니다.

 

2. 서인과 효종이 집권하는데에 대한 명분 강화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뒤에 자신들의 최고의 명분으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이 시대의 사대부들의 생각에 부합했고, 이러한 북벌론은 숙종 대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때 서인들의 영수가 송시열이었는데, 그는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지방에서 후계자의 육성에 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황과는 다르게 조정의 정치에 관여를 많이 했는데,(이황은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함.) 특히 북벌론은 이 시대의 유력한 정책사상으로 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왕은 실제로 송시열과 1:1대면을 통하여 청나라를 칠 경우에 서인들이 규합하여 이에 응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한 방위의 중요성을 깨달음

 

명분 외에도 효종이 특별히 병력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꾸준히 시킨 것은 이전의 두 전란을 통한 외부 침입에 대한 준비차원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선조는 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을 했는가 하면, 인조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40일 이상을 항쟁하다가 항복하는 상황을 경험했으니 그의 아들로서 당장의 신변보호를 위한 조치의 차원으로 병력보충을 했다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이유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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