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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내용과 특징 2016.09.13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내용과 특징최승로의 시무 28조의 내용과 특징

Posted at 2016. 9. 13. 18:25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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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의 시무 28조의 내용과 특징

 

최승로가 태어난 것은 후삼국 시대입니다. 6두품 출신이었는데 고려가 건설된 이후에 한동안 개국공신 위주의 지방호족들에 의한 정치를 하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칠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광종시기에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뜻과 지식이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중앙으로 진출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품은 정치적 신념을 펼친 것은 고려 성종시대로 이때부터 중앙집권이 아닌 왕과 신하가 조화를 이루는 유교적 정치구조를 띄게 됩니다.

 

 

1. 시무 28조의 주요 내용

 

첫째, 불교적인 행사로 인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하고자 합니다. 또한 당시는 불교에 의한 통치구조였으나 중국의 유교적인 정치관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실천되었고,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유가적인 모습을 약간씩 띄게 됩니다. 특히 왕과 신하의 관계나 양인과 노비의 관계 등으로부터 사회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둘쨰, 왕이 정한 지방관을 각지에 파견하도록 건의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12목의 설치와 목사를 보냈으며, 이로 인하여 예전의 호족이 다스리던 상황보다는 조금 더 체계적인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띄게 됩니다. 

 

호족의 경우는 자신들이 사병을 거느리면서 중앙을 압박하였으나 지방관은 정부의 직속부대에 해당하므로 그만큼 중앙정부의 불안감은 감소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셋째, 중국에 대한 자주적인 세계관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예전에는 당나라의 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무분별하게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고려 초기에는 해외의 유학파나 중국출신을 우대했으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중국의 유가적인 부분과 정신세계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을 우대하여 우리 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사는 곳이 다르므로 당연히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그것은 지극히 자주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훈요10조와 시무 28조의 다른 점

 

첫째, 왕건은 불교를 중시하라고 하였으나 최승로는 유교를 중시하도록 하였습니다. 불교는 신라시대의 정치이념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당시는 유교적 사상이 오히려 통치에 적합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 연등회와 팔관회를 꾸준히 열어왔던 것을 폐지하도록 주장했습니다. 이 두가지 행사는 불교의 행사지만, 이것을 추진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 했으므로, 폐지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셋쨰, 왕건은 중국을 따르기 보다는 자주적으로 우리 풍습을 만들어 나가길 원했으나 최승로는 유교적인 세계관은 그들을 따르되 나머지 부분은 이전처럼 자주적으로 이어가길 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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