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 다각도로 분석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 다각도로 분석

Posted at 2016. 3. 9. 19:19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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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 다각도로 분석

 

이 두 전투는 거의 40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며, 임진왜란은 6년, 병자호란은 2개월에 걸친 전투였습니다.

 

임진왜란의 경우는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 이후에 서로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전시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고, 전쟁 중에도 백성을 버리고 궁을 떠난 선조의 모습은 가관이었죠.

 

병자호란은 인조나 대신들이 너무 엉뚱한 때에 의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겠습니다.

이미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보다는 현재의 강국인 청나라를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가야할 길을 도모하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도 현명한 판단이 부작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1. 인명적 손실

 

왜군과의 전투로 인한 관군이나 의병들이 많이 죽어 갔으며, 그들에 점령당한 이후에 조선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민간인들의 사정없이 죽였다고 하는데 병사와의 희생수를 합치면 수십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한 이 당시에 우리나라의 호국영웅들이 이 전쟁이 끝날 때 쯤이면 거의 목숨을 잃었으니 인재적인 피해도 굉장하다고 봐야 하겠죠.

 

호란 때는 이보다 전투가 길지 않아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강화도 전투로 인하여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고,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수십만의 여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2. 경제적 손실

 

전쟁 중에는 농사를 짓기가 힘들었을 것이므로 당시의 곡식은 전라도를 제외하면 거의 구하기가 힘들었다고 봐도 무관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전라도 지역은 수군이나 진주성 등의 전투로 인하여 전략적인 요충지를 확보함으로서 이 지역은 왜군이 침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곡식의 재배에 따른 세금의 의미로 걷어들이는 농토는 전쟁 전에 비하여 1/3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하며, 전후의 복구작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국가의 경제는 거의 마비의 단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많은 인명의 피해로 인하여 생기는 인구의 감소는 결국 노동력의 감소가 되는 것이므로 이 또한 경제적으로 손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사회질서 붕괴

 

선조가 북으로 피난을 한 이후에 화가 난 민중들은 궁에 들어가 물건을 파손했다고 하는데 이때 국고에 해당하는 노비문서를 태움으로서 공노비들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풀리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국고가 많이 비는 관계로 신분을 돈으로 살 수 있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엄격했던 신분제도가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한 개인이 땅문서를 소실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으므로 힘있는 양반의 손으로 넘어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4. 문화재 손실

 

임진왜란 시에 전국 각지로 침투한 일본군에 의하여 문화재의 피해가 막대한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복궁은 아예 불이 타서 없어졌으나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여 현재와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도 불에 타서 거의 소실된 상황이었으나 후에 다시 재건하였고, 범어사, 불국사가 불에 탔고,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네곳에 있었는데 전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습니다.

 

다행히도 네곳에 이것을 보관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문화재가 소실이 되어졌고, 그 시기의 도자기 기술자의 다수가 일본으로 끌려가서 당시의 발전된 도자기 기술이 침체되어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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