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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조반정 원인, 내용 살펴보기 2016.04.10

인조반정 원인, 내용 살펴보기인조반정 원인, 내용 살펴보기

Posted at 2016. 4. 10. 18:14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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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원인, 내용 살펴보기

 

인조는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분으로 통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전에 왕이었던 광해군의 폐위 이유가 그다지 옳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이 예전에 비하여 많이 달라졌다는 거죠. 그는 대신들의 눈치를 보는 왕이기 보다는 백성을 위한 왕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가지 원인에 따른 반정의 내용

 

첫째,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을 무리하게 수리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민생은 거의 도탄에 빠진 상황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궁궐을 짓는 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장정들에게는 치명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서인들은 이것이 불만이었고 결국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전란 후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왕의 입장으로서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정황 상으로 오히려 궁궐을 고치려고 한 것이 더욱 명분상으로도 옳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둘째,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당시는 유교국가로서 이것은 철저히 중국을 숭상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공자나 주자의 학문을 모든 사대부들이 따르는 사회에서 청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는 점은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광해군을 따르던 북인조차도 비슷한 지경이었으니 비록 그 선택이 실리에는 옳았겠지만, 국내 대다수의 사대부를 적으로 만드는 위험에 빠진격이었습니다.

 

이것이 반정에 대한 가장 큰 명분으로 꼽고 있는데, 이 부분 또한 그들의 선택이 틀렸다는 점은 얼마 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즉각 깨닫게 했습니다.

 

어치피 이길 수 없는 국가였다면,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국가의 긍정적인 방향을로 이끄는 것이 군주와 대신들이 해야 할 선택이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참 아쉽기만 합니다.

 

 

셋쨰,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사사한 점입니다.

 

선조는 매사에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자신보다 인기 좋은 세자의 모습을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자 반대 세력에 있던 서인들은 영창대군을 위시로 하여 모반을 일으켰으며 이를 제지한 후에 유배를 시켰다가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마지막 왕후로서 영창대군의 모친이 됩니다. 그의 아들이 모반의 관련이 되었으나 이게 직접 관여한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퇴출하고 서궁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반정의 명분이 될 수가 있는 지는 서인들이 먼저 모반으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의 평가

 

영조의 경우에도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으로 평생 죄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경종이 임기 4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었고, 영잉군(영조)은 노론들의 압박에 의하여 세제에 까지 임명되었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왕이 죽은 것이 독사가 이유라고 의심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조의 경우는 확실한 정황은 없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비판하기는 힘들고, 그가 왕이 된 이후의 정치는 조선의 누구와 비교해봐도 뛰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비난보다는 업적을 대단하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인조의 행위는 거의 쿠데타와 비슷한 지경이고, 그 명분이 위와 같이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서인들은 조정에서 완전히 실권된 상왕이었고, 그들이 다시 정계로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시 군주의 조그만한 실수를 크게 확대한 바가 크고 그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오히려 그전보다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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