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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조 삼전도 굴욕의 내용 2016.04.17

인조 삼전도 굴욕의 내용인조 삼전도 굴욕의 내용

Posted at 2016. 4. 17. 17:00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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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삼전도 굴욕의 내용

 

이 사건은 결국 인조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약 그가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이어갔다면 삼전도 굴욕같은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없겠죠.

 

당시에 후금도 조선이 자신들과 한패가 되기를 바랬으니까 말입니다. 명나라도 상대하기가 벅찬데 굳이 조선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이것은 우리나라로서는 좋지 못한 외교정책으로 생긴 일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1.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화난 서인들

 

서인들과 인조는 명나라를 버리고 청과 친하게 지내는 광해군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화답으로 반정을 노렸고 결국 거사는 아시다시피 성공적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광해군에 대한 비판만 있을뿐 그 다음의 대책은 전무했습니다. 단지 유교를 믿는 국가로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그 외의 정책은 단지 그들의 자리를 지키거나 금전적인 이득을 얻는데 급급했죠. 따지고 보면 이들이 결국은 광해군보다 훨씬 못한 위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발발

 

인조는 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에 도움을 주려고 애썼습니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대치하면서도 거의 엇비슷한 전력을 보여주었으나 명나라 내의 내분으로 인하여 서서히 후금이 명을 이기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심하게도 우리나라는 청을 배척한다고 했으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죠. 이러한 상황을 거슬리게 생각하던 청은 1차 침입을 감행했고, 막상 그들이 침입하자 찍~ 소리도 못하고 항복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이는 정묘호란으로서 결국 그들과 형제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자 인조는 화가났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막상 싸울만한 준비도 안되어 있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는 격이죠.

 

이때 그들은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12만 대군을 보냅니다. 그들은 임진왜란의 일본군과는 다르게 중간지역과의 전투를 생략하고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을 합니다.

 

원래 조선왕실은 강화도로 피신을 하려고 했으나 적군의 너무도 빠른 진격에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병력으로나 무리로서나 그들은 예전의 일본군을 능가하는 상대였고, 45일간 항전을 했으나 결국 못버티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3.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결국 청태종에게 찾아가서 군신관계의 행사를 치르게 됩니다. 여진족의 관례상 그럴려면 세번 큰절을 하고 머리로 땅을 9번 찍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행사를 마치고 나서야 그들의 신하가 될 수 있는 거죠.

 

우리나라가 여진족에게 이렇게 치욕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개국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중국에게도 이 정도의 치욕은 당한적인 없었거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모두 겪은 백성들은 이후로 아주 힘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백성들을 이해했다면 그들과 친교를 맺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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