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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아들 처절한 왕위의 다툼왕건의 아들 처절한 왕위의 다툼

Posted at 2016. 8. 28. 18:01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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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아들 처절한 왕위의 다툼

 

왕건은 국가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와 비교해보면 대체로 비난을 조금 더 적게 받는 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의 경우는 신라 정부가 워낙 부패된 상황이어서 오히려 새로운 국가가 새워지기를 백성들이 바랬을 것이기 때문이죠. 비록 궁예에 대한 배신자의 오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이성계의 경우는 어명을 어기면서 위화도회군을 했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임금에 반기를 들었기 떄문에 약간의 원성을 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시야를 고려 초로 돌려보겠습니다. 이때의 2~4대 군주들이 모두 형제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왕위다툼이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1. 왕무 혜종

 

그는 맏왕자로서 후백제를 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특별히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장남으로서 2대왕에 추대됩니다.

 

하지만 그의 모친은 나주출신으로 그다지 강한 힘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박술희와 왕규 등이 그를 돕는 세력이었으나 너무도 많은 공신들의 압박과 이복 동생인 왕요와 왕소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결국 서경세력인 왕식렴 등에 의하여 임금의 자리를 불과 3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내놓게 됩니다.

 

2. 왕요 정종

 

고려의 세번째 왕이 되는 그는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왕건의 둘째 아들이였습니다. 그의 모친은 충주출신으로 세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여전히 너무도 강한 공신들의 압박에 의하여 제대로 왕권을 펼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서경천도로 개경의 호족들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실패로 돌아갔고, 거란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광군을 설치하였습니다.

 

여진족의 공물을 둘러보다가 벼락소리에 놀란 이후로 몸이 아프게 되었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과정이 약간은 의아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록된 내용은 이렇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3. 왕소 광종

 

장남과 둘째 아들이 죽은 후에 셋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혜종과 같은 모친이고, 두 왕후 모두 힘있는 호족 출신이었기에 권력은 이전보다 강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공신들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던 상황이었습니다.

 

첫째, 스스로 활제라 칭했습니다.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결국 그의 사후의 묘호인 광종과 비슷하죠. 아무튼 고려시대에 연호를 사용한 것은 세 분밖에 계시지 않으므로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 노비안검법으로 원래는 양민출신으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풀어주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이 됨에 땨라 반발이 많았으나 그는 아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셋쨰,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호족들의 중앙진출을 위협했습니다. 그들의 밥줄은 결국 좋은 부모를 두었다는 것인데, 과거제도로 인하여 실력위주의 인사를 실시한 것으로 임금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넷쨰, 관복을 제정하여 왕실의 질서를 바로 잡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그냥 호사스러운 옷을 입거나

과거의 후삼국 시대의 관복을 그대로 입기도 했으나 이것들을 조정하여 질서있게 관복을 입도록 했습니다.

 

다섯째, 공신들에게는 너무도 혹독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들도 결국은 고려의 개국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신하들인데 막상 새로운 왕조가 생기고 나니 가장 상대하기 힘든 상대가 된 것이죠.

 

결국 군주의 권력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이러한 개국공신들을 한명씩 처단해가면서 정적을 없애도록 했는데 이때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좋지 않은 견해도 많이 있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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