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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오사화 사건의 비평 2016.01.30

무오사화 사건의 비평무오사화 사건의 비평

Posted at 2016. 1. 30. 19:09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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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사건의 비평

 

조선시대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화이자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인 대립이 격렬해짐에 대한 증거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오사화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왕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 왕의 입장은 두 정치 세력이 싸우는 가운데 자신과 더 잘맞는 훈구파와 결탁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해석이 되겠습니다.

 

 

무오사화의 내용

 

성종의 실록을 편찬할 때 당시의 책임자는 이극돈이었는데, 그가 사초의 내용을 보았을 떄 자신에 대한 기록이 좋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글을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자광이 이를 보고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그는 세조 때의 공신이지만 출신이 미천했기에 그 이후로 출세가 어려워진 상황인데다가 조정 대신들의 정책에 한사코 반대를 하는 삼사의 대간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으므로 그것들에 대한 대가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연산군은 사초의 내용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포함된 것을 보았고, 그것은 결국 자신의 할아버지 뻘인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것을 알고 사초를 작성하거나 도움을 준 자들을 처벌하게 됩니다. 이로서 사림은 정계에서 엄청난 인원이 축출이 되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이 사건의 승자는 누구인가?

 

이 사건의 시작은 이극돈이었으나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유자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동안 잊혀진 예전의 공신이었던 그가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겠죠. 개인적인 한명을 꼽으로면 최고의 승리자는 유자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를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는데 그들은 모두 훈구파들로서 사림에 의하여 최근에 많은 고통을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성종시대에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삼사의 권한을 강화시킨 이후로 대신들은 대간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을 정도로 대간들의 비판이 그들의 입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사림은 한동안 위축되고 그들은 한동안 활개를 펴고 장치활동을 펼칠 수 있었겠습니다. 결국 가장 사실적인 승자는 훈구파라고 할 수 있겠죠.

 

연산군의 입장을 살펴보면 그도 역시 대간들과의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고 합니다. 성종의 경우는 말년에 자신이 권한을 올려준 삼사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연산군은 부임 초부터 왕권강화를 위하여 이들과의 갈등이 많았으므로 이 상황을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로 여겼다고 합니다.

 

결국 대신들과 연산군은 모두 이 일로 인한 승자가 될 수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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