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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의 배경, 원인, 결과 살펴보기묘청의 난의 배경, 원인, 결과 살펴보기

Posted at 2016. 12. 15. 19:49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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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의 배경, 원인, 결과 살펴보기

 

후고구려로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고구려에 대한 계승자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중심 세력이 위치한 바에 따라 수도는 개경으로 정했고, 언젠가는 고구려처럼 강성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왕건이 죽은 후에도 수도 이전의 입장에 따라서 귀족들의 분쟁이 많았으나 계속적으로 보수적인개경파가 승리함에 따라 결국은 점점 고려는 소극적인 국가로 변해갑니다.

 

 

1. 서경천도운동의 배경과 원인

 

첫째, 묘청의 풍수지리사상에 의한 천도 주장

 

이자겸의 난을 겪은 이후에 왕권은 땅으로 떨어지고 언제 또 다른 불순한 세력이 나타나서 위협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신진세력이었던 승려 묘청은 당시의 풍수지리사상을 토대로 서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울 경우 국력이 더욱 강해지고, 금나라까지 정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는 풍수지리설이 사회적으로 유행하던터라 임금도 이 말을 믿었고, 서경에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새궁이 완성되어도 전혀 나아질 것이 없어지자 수도를 옮기고자 하는 정책적 의지는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이에 반대세력들을 제거하고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됩니다. 다만, 특이한 점은 나라는 새롭지만 왕은 따로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들은 모반이 목적이 아니라 천도가 주요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둘째, 금나라에 굴욕적인 외교를 맺으려고 하는 데에 대한 불만

 

여진족은 고구려 시대에는 아래 계층의 민족으로 통했고, 이후에는 오랑캐로 취급하면서 우리나라에 사대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거란이 힘이 없어진 틈을 타 금을 건국한 그들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고, 송나라 조차도 감히 대적하기 힘든 막강한 상대로 변해갔습니다.

 

이에 고려시대 인종은 굴욕적인 군신의 예를 가졌으나 당시 백성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계층 아래의 민족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입장이니 말입니다. 마침 묘청이 금나라의 정벌을 주장하자 민중들도 이에 호응하고 점점 천도의 세력이 막강해지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2. 서경천도운동의 결과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주장이 왕과 개경파에 의하여 좌절되자, 서경파들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인종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대개 반란은 왕에게 비밀로 하는 반면에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널리 알린 것입니다.

 

김부식은 반란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각지의 성의 백성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며, 점점 반란군의 세력이 약화되자 중심세력 중 한명인 조광이 묘청 등을 죽이고 항복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사신을 옥에 가두었기에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끝까지 항쟁을 하지만 1년이 지난 후에 반란군은 진압이 됩니다.

 

3. 묘청의 난 이후의 변화

 

이후로 서경세력은 거의 몰락하고 개경세력이 고려를 장악하게 됩니다. 왕의 경우에는 안그래도 힘이 없었지만, 이후로는 귀족끼리의 분쟁도 적어졌기에 임금은 아예 허수아비가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군주의 입장으로서는 신하들의 세력이 나누어지는 것이 좋은데, 한쪽의 집중된 공격을 당하게 되니 더욱 난처하게 된거죠.

 

김부식의 아들이 집권하던 때에 정중부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이후에는 아예 무신이 임금과 문신을 농락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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