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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과정과 원인 분석 2016.08.09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과정과 원인 분석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과정과 원인 분석

Posted at 2016. 8. 9. 21:07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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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과정과 원인 분석

 

아마도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역사상 일본에게 당한 가장 불쾌한 사건 중에서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주 오래된 일로 생각되겠지만 불과 지금으로부터 거의 120년 전에 발생했네요. 조선의 국모가 살해된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온나라가 통채로 그들에게 잡아 먹혔던 굴욕적인 일은 어느 누구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현재는 우리나라의 통일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서 경제나 국력의 증강도 항상 염두해야 할 것이라는 점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시해의 원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에 그들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습니다. 가장 부담스럽던 존재이던 청나라를 이겼으니 더이상 그들이 조선을 장악하는데 아무런 꺼리낌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만주로까지 세력을 넓히려고 하는 데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도 남하정책을 위하여 만주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랴오둥반도를 돌려주라는 것과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줄아라는 내용의 3국간섭을 하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이 시기에 러시아 공사관인 베베르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의 힘에 의지하여 친일세력을 몰아내고 친러세력을 일어켰으며,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정책을 폐쇄해 나갔습니다. 이에 그들은 민비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것은 조선에서의 친러세력의 핵심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

 

 

2. 시해의 과정

 

일본은 공사관을 문관출신에서 무관출신으로 교체했습니다. 공사관이 해야 할 외교적인 임무를 생각한다면, 무관에게 맡긴다는 것은 의외의 인사였다고 합니다.

 

미우라 공사는 군인, 경찰관, 공사관 인물, 잡배 등을 이끌고 경복궁을 침입했고, 당시 왕실의 군인으로서는 그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명성황후는 시해와 함께 기름을 뿌려서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완벽범죄를 져지른 후에 도주했습니다.

 

그들은 민비를 죽인 주동자는 그들이 아닌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군인들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대원군의 지휘 하에 왜군이 함께 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으며, 일개 공사관이 정부의 승인없이 개별적으로 이렇게 스케일이 큰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이런 만행을 저질렀지만 본국에서 사건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여기에 가담된 전원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을미사변이라고도 부르며 이로 인하여 조선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왕비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들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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