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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해군 중립외교의 명과 암 2016.03.17

광해군 중립외교의 명과 암광해군 중립외교의 명과 암

Posted at 2016. 3. 17. 17:04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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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중립외교의 명과 암

 

인조반정 이후에 사관들은 새로운 정권을 찬양하기 위하여 광해군의 잘못된 정책을 꼽아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가 끝나는 상황까지도 광해군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것은 묘호가 여전히 없는 것으로 확인이 가능하겠습니다.

 

그는 특별히 연산군처럼 모나게 잘못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선조나 인조보다는 오히려 더 정치를 잘했는데 어떤 점에서 당시의 정치인들은 그를 미워하게 되었을까요?

 

 

당시 조선이 처한 상태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후금이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명나라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예전에 금과 송나라와 관계처럼 오히려 중국이 여진족에 밀리는 정세를 보였습니다.

 

조선으로서는 예전의 고려가 했던 것처럼 양국과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적절하게 이득을 얻도록 하는 이른바 실리외교가 올바른 책략이라 하겠습니다.

 

광해군도 아마도 고려시대의 상황을 본받으려 했고, 결국 인조시대에 청나라에 당한 굴욕과 피해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올바른 처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중국을 아버지의 나라로 생각했고, 그 상황에서 그들을 돕지 않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 여겼습니다.

 

중국이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게 한 것은 결국 그들이 오랑케로 여겨온 조선을 길들이기 위한  나의 방책이었으며, 해마다 감당하기 힘든 조공으로 우리나라를 괴롭혀 온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사대정신이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의견과는 너무도 달랐다.

 

성리학에 의한 정치는 왕이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다수의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대간들이 올리는 상소에 귀를 귀울여서 왕과 신하가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을 모태로 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신하들과의 학문과 의견을 교환하는 경연의 자리에 거의 참여를 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당파(북인)에 지나치게 세력이 기울였던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소외를 받던 남인이나 서인의 세력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정계로 진출할 날을 생각하면서 잔뜩 움추려있지만 실제로는 마음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세운 중립외교는 붕당을 막론하고 사림에 속한 모든 선비들에게는 의리를 져버리는 소인배같은 처사로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광해군이 전적으로 의지했던 북인조차도 대부분이 중립외교정책에 반대를 했을 정도이니 그 상황은 왕실에서 누구도 도와줄 이가 없는 외로운 입장해 처한 것이죠.

 

그가 폐위를 당하게 된 가장 큰 실수로 사람들은 외교정책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실제로는 그의 정책이 현실적이었지만, 당시 국내의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을 약간만 굽혔다면, 오히려 폐위라는 불명예를 가지지 않고 나름대로 괜찮았던 임금으로 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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