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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해군과 인조는 이렇게 다르다. 2016.03.24

광해군과 인조는 이렇게 다르다.광해군과 인조는 이렇게 다르다.

Posted at 2016. 3. 24. 16:22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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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과 인조는 이렇게 다르다.

 

역사적으로 가장 억울한 왕과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 묘호만 멋지게 치장한 왕을 비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까닭으로 광해군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그도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것은 연산군 때처럼 많은 횟수의 옥사가 있었다는 점이죠. 각지에서 반역을 꾀했다는 정보에 의한 처벌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부분은 증명되지 않은 허위사건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선조에게서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임금이 되는 순간까지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에 대한 불만이나 복수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1. 대외 관계

 

광해군의 업적 중에서 가장 현명했던 것으로 중립외교를 일컫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차피 강성해진 청에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명나라와도 이전까지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중립외교로 사대부들의 반발이 매우 컸으며, 폐위가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인조는 청을 배척하고 명과의 사대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로 인하여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국난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결국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거죠. 어차피 청에 이기지 못할 것을 왜 굳이 대외명분을 그렇게 중시했는지 참 답답하네요.

 



 

2. 신하들과의 관계

 

광해군은 자신을 왕위로 세워준 북인들을 위주로 정치를 하려고 하였고, 특별히 자신과 뜻이 잘 맞다고 여기던 이이첨에 힘을 많이 실어주었습니다. 이로 말미 암아서 조금씩 조정은 이이첨을 중심으로 돌아가서 권력이 한 군데로 치우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인조는 반정을 도운 서인들과 정치를 함께 하려 했으나 그외의 다른 당파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인들 중에서 자신과 맞지 않은 의견을 내세우는 신하는 가까히 두려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핵심세력이 계속 바뀌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3. 정책적 업적

 

광해군의 경우는 임진왜란 후에 불탄 각종 궁궐을 다시 재건하는 데 노력하였고, 이원익의 의견을 따라서 대동법을 수도권을 위주로 실행하였습니다.

 

당시 국가적으로 혼란을 겪는 상황이었으므로 욍위에 오른 직후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으나 이미 선조시대부터 분조를 겪었고, 왕이 되기 위한 충분한 준비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나름대로 괜찮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됩니다.

 

인조의 경우는 반정 이후에 자신은 이전의 정권과는 정반대로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대동법은 확대 실시를 시도했지만 전란 떄문에 실행이 어려울 것으로 여기고 다시 이전처럼 수도권만 실행하도록 변경하였습니다.

 

그가 백성을 위해서 시도한 정책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병자호란 당시에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선조와 별 차이가 없는 한심한 임금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에 대한 모습이 밉상으로 나오는 것도 아마도 그에 대한 얄미움이 작가나 감독에게 미쳤음을 의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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