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의 원리와 수원 화성의 의미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의 원리와 수원 화성의 의미

Posted at 2016. 7. 16. 17:28 | Posted in 역사 비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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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의 원리와 수원 화성의 의미

 

요즘도 도르레의 원리는 다양한 용도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특히 아파트 이삿짐을 옮기거나 건물공사나 수리를 할 떄 사용되는 경우가 많죠. 이 밖에도 이것이 응용되는 곳은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이전의 조선에서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무거운 물건을 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장정이 필요했겠죠. 그런 공사를 하게 되면 백성이나 대신들의 반대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정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수많은 서적을 참고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로 조선만의 새로운 거중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 거중기의 원리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물건이 바로 거중기입니다. 일단 구조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간쪽에서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4개씩의 작은 도르레가 있습니다. 그리고 양사이드에는 큰 도르레가 있고, 그 밑에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용할 경우에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무게보다 8배가 되는 무게의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한명이 50kg의 돌을 들 수 있다면, 이것을 사용할 경우에는 50kg * 8 = 400kg을 들어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네요.

 

이전까지 사용되던 건축공사 시의 인부의 수를 대폭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사용되던 국고를 줄일 수 있어서 백성이나 왕실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도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거중기로 만든 작품 수원화성의 의미

 

첫째, 정조의 효성과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만든 수작이다.

 

사도세자가 원래 묻혔던 곳은 당시는 죄인의 몸이라 너무도 초라했기에 왕이 된 후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존호를 바꾸고 화산 쪽으로 부친의 묘지를 옮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 주위에 살았던 백성들은 졸지에 살 곳이 없어진 상황이었기에 수원 쪽에 그들이 거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둘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남쪽의 방어기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꺠달았던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마땅하게 왕실을 보존할 만한 방어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다른 성의 함락은 생략하고 곧바로 한양으로 향했기에 인조는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한 채로 남한산성에서 갖힌채로 그들의 공격을 버텨야 했습니다. 전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기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죠.

 

셋째,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에 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은 거의가 한양부근에서 거주하는 자들로서 이 세력이 한곳에만 집중되는 것은 결국 왕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수원쪽에 또 다른 성을 제작하여 많은 백성들이 거주하도록 함으로써 한양의 세력을 견제하도록 하려던 노력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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